한글의 인쇄 활자는 세종 25년(1443)부터 제정에 들어가 세종 28년(1446) 10월 9일 반포된 훈민정음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인쇄 활자는 세계 으뜸의 역사를 가진 상정예문자(詳定禮文字, 1234)에서 비롯되었다 하겠으나, 이것은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1377년 놋쇠 활자로 인쇄된 청주 흥덕사 경판(興德寺 經板)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은 그 실물이 프랑스의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어 우리 인쇄 활자의 역사가 독일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보다도 70여 년 이상 앞서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 뒤에도 계미자(癸未字, 1403)ㆍ경자자(庚子字, 1420)ㆍ병진자(丙辰字, 1436) 등 금속 인쇄 활자로 여러 책들을 인출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한자로 된 것이었다.
한글이 인쇄 활자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447년 7월에 펴낸 ≪석보상절≫ㆍ≪월인천강지곡≫ 등에서라 할 수 있다. 이 두 책은 한자와 한글을 섞어 인쇄한 것인데, 한자는 1434년 놋쇠로 만들어진 갑인자(甲寅字)의 활자체에, 한글은 나무로 만들어진 목활자로 짜여져 있다. 이 한글 활자체를 갑인자체 한글자라 이름하기도 한다.
그 뒤 1455년 을해자(乙亥字)와 더불어 놋쇠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한글 활자는 1465년 을유자(乙酉字)를 비롯하여, 1580년의 경진자(庚辰字), 1603년부터 50년간 사용한 훈련도감자(訓鍊都監字), 그리고 1668년 갑인자체를 본뜬 무신자(戊申字)와 1693년의 원종자(元宗字), 목활자인 1778년의 정유자(丁酉字)와 1895년 ≪소학독본≫ 등을 인쇄한 학부활자(學部活字)로 그 맥을 이어왔다.
한글 활자체는 초기에는 한자체와는 달리 오늘날의 고딕체와 같이 직각 모서리를 가진 딱딱한 형태였으나, 차차 붓글씨의 영향을 받으면서 부드러운 형태의 체로 바뀌었다.
인쇄 문화는 초기의 수동 방식에서 점차 기계화되면서 고성능의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특히, 책의 인쇄는 문자에 의한 활자가 기본이 되는데, 한글은 한문과 더불어 로마자에 비해 기계화에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1980년대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컴퓨터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인쇄는 물론 일반 문서에까지 널리 이용되면서 한글의 기계화·전산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한글의 기계화·전산화는 한글 타자기·한글 식자조판기·한글 텔레타이프·한글 모노타이프에서 한글 컴퓨터로 그 발전이 진전되어 왔다.
과거 한글의 기계화는 한글 글자를 빠른 시간 안에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여기에는 한글을 매체로 하는 각종 한글 기계들의 글자판을 과학적인 배열을 통해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커다란 과제로 등장했다. 하나의 자판을 익힘으로써 타자기나 워드프로세서는 물론, 식자기나 컴퓨터 등을 손쉽게 다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한글은 풀어쓰기 형태인 로마자와는 달리 자음과 모음을 합쳐 한 글자가 이루어지므로 기계화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과거의 인쇄 활자는 ‘가’·‘각’·‘나’·‘낙’·‘다’·‘닫’ 등과 같이 미리 만들어져 있는 글자 하나하나를 문선이나 식자를 통해 찾아서 나열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으로 인쇄를 하려면 이론상으로 자음 19개×모음 21개×받침 28개로 모두 1만 1,172자가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많은 수의 글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반 인쇄소나 사진식자기는 그보다 약 2,300자 내지 3,000자 정도 많은 숫자의 활자를 갖추어 놓고 있었다.
원래 한글은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의 자음 14자와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의 모음 10자, 도합 24자 자모의 낱자로 적게 되어 있으며, 이들 낱자로 적을 수 없는 소리는 ㄲ, ㄸ, ㅃ, ○, ㅉ, ㅐ, ㅒ, ㅔ, ㅖ, ㅘ, ㅙ, ㅚ, ㅝ, ㅞ, ㅟ, ㅢ처럼 2개 이상의 낱자를 함께 적도록 되어 있다.
컴퓨터 인자(印字)의 경우는 앞의 자모 24자에 이중자모 16자를 합쳐 40자면 어떤 글자라도 모두 처리할 수 있다. 물론 한 문장을 만들려면 ‘, · ! “” ‘’ ( ’ 등의 부호나 숫자, 로마자 등이 있어야 하므로 그 이상의 것이 갖추어져야 하겠지만, 한문을 쓰지 않는 한글만의 경우는 문서 입력의 능률을 몇십 배 이상으로 제고시킬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한글은 전통적으로 기본 자모의 형태가 아닌 네모꼴 속에 들어가는 형태의 글자에 익숙했기 때문에 각각의 낱글자를 이용하여 모든 인쇄 매체를 조판, 인쇄해 왔다.
문자의 기계화는 금속 활자의 발명에 따른 인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으나, 한글의 기계화를 개발, 발전시킨 것은 타자기와 텔레타이프, 사진식자기 등이었다.
종래의 일반 인쇄 조판에서 수천 개의 낱글자를 일일이 문선, 식자하던 방식을 벗어나, 한글의 기본 자모만을 준비해 놓고, 필순에 따라 인자하면 찍는 순서대로 자모가 모아져 하나의 글자를 만들어 내는, 한글의 자·모음 조합식 방법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조합 방식으로는 한글의 기본 자모만 있으면 어떤 글자든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이 방식은 과거의 타자기는 물론 사진식자기와 텔레타이프 등에서 이용되어 왔는데, 타자가 용이하고 속도도 대단히 빠르며 익히기가 쉬웠다.
지난날의 인쇄는 대부분 납에 의한 활자식 인쇄(hot type system, HTS)였으므로 문자 조판 분야는 인쇄 기계화의 사각지대로 여전히 종래의 활자에 의존하였다. 그러던 중 1924년 세계 최초로 일본의 모리사와(森澤信夫)가 발명했다는 모리사와식 사진식자기와 샤켄(寫硏) 사진식자기 등이 1960년대 초반경 일본으로부터 수입되면서 문자 조판의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식자기의 글자 배열이 비과학적·비능률적이었으므로 편집·교정 등의 어려움은 물론 3,000여 자의 자판을 일일이 외워 타자해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특히 숫자와 로마자, 약호와 한자 등은 자판을 다시 갈아 끼워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결과적으로 한글 활자의 기계화를 가로막았을 뿐더러, 글자체조차 일본에서 도안된 것을 그대로 써야 했으므로 인쇄 문화의 일본 예속화가 우려되기도 했다.
이 사진식자는 인쇄를 납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한 콜드 타입 방식(cold type system, CTS)의 촉진에는 어느 정도 공헌했을지 모르나 한글의 인쇄 활자 기계화에는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한글의 글자 원리와 모양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도 없이 기계만을 팔고자 했던 일본의 사진식자기를 그대로 받아들인 우리의 인쇄계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한글 기계화와 글자 모양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첨단 과학의 발달은 빠른 속도로 문자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오늘날의 컴퓨터 식자 방식(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 CTS)은 인쇄에 있어 문선·식자·교정·조판 작업을 컴퓨터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이미 1960년대에 서독의 디지셋(Disiset), 미국의 라이노트론(Linotron)·비디오콤프(Videocomp) 등의 출현으로 실용화되고 있었다.
이 컴퓨터 입력 방식은 종래의 일본식 사진식자기와는 달리 편집과 교정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한번 입력된 문자의 크기와 행간 등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문자 인쇄의 혁명적 기계로서, 인쇄 공장의 수많은 재고 납활자와 핫 메탈(hot metal)을 추방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이 컴퓨터 식자기의 도입 초기에는 한글의 글자 모양에 따라 입출력에 상당한 차이가 발생하였다. 일본을 통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초기의 컴퓨터 식자기는 잘못된 문자 배열 방식 때문에 26자만을 이용하는 로마자의 경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입력 속도가 느렸다.
당시에는 한글의 모양이 로마자와 같이 네모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그림 1]. 한글이 네모꼴을 벗어날 경우에는 문자 입력의 속도가 빨라지며 가독성(可讀性)도 높아지리라는 것이었다.
팅커(Tinker, M.A.)는 고전적 스타일의 숫자가 모던 스타일의 숫자보다 가독성이 높다는 연구를 발표한 바 있는데, 그 까닭은 고전적 스타일의 숫자는 어센더(ascender)와 디센더(descender)가 숫자의 꼴을 서로 다르게 보이도록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림 2].
한글이 네모꼴을 벗어날 때 인쇄의 기계화는 가속화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한글의 표준 글자꼴이 갖추어져야 수평 기계간, 즉 타자기는 타자기끼리, 통신용 텔레타이프는 텔레타이프끼리, 그리고 컴퓨터는 컴퓨터끼리의 조형적 원칙과 인자 원칙 등이 지켜질 뿐만 아니라, 수직적으로도 타자기, 워드프로세서에서 컴퓨터에 이르는 유기적 관계가 이루어져 상위 기종과 하위 기종이 일정한 규칙 아래 불편 없이 사용될 수 있다.
컴퓨터의 경우는 표준 글자꼴의 구비와 통일 못지않게 한글 코드(부호)의 표준화가 필요하다. 국내에는 19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컴퓨터 한글 부호 체계가 운용되고 있어, 기종이 다른 시스템 간에는 한글 정보 교환이 불가능하여 정보 사회의 기본 요소인 데이터 통신망 구축에도 많은 장애 요인이 되어 왔다.
한편, 플로피 디스크나 프린터 등 컴퓨터 주변기기도 제조회사가 다를 경우 호환성이 없어지기 때문에 제조 회사들이 각기 다른 시스템에 따라 기기들을 생산해야 하는 어려움이 뒤따르게 된다.
또한 소프트웨어 개발자들도 동일한 기능의 소프트웨어를 컴퓨터 기종에 따라 달리 개발해야 하는 등, 한글 부호가 통일되지 않은 컴퓨터 시스템은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글 코드의 통일이 요망된다.
한편, 현재 한글 컴퓨터의 입력 방식은 2벌식 글자판과 3벌식 글자판의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입력 방식은 글자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다. 로마자는 입력 방식이 자모 방식만으로 되어 있어 크게 중요하지 않으나, 한글은 자모 입력 방식에서 2벌·3벌·4벌 등 여러 가지가 있어 그 방식에 따라 글자꼴에 미치는 영향이 각기 다르다[그림 3].
날로 대중화되어 가고 있는 컴퓨터의 자판 배열은 한글의 기계화·전산화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어 통일된 글자판의 보급이 중요시된다. 2벌식과 3벌식은 자판을 인식하는 방법이 서로 다르다. 2벌식은 한글의 초성과 받침으로 쓰는 종성을 구별하지 않는 자판 체계이며, 3벌식은 같은 ‘ㄱ’ 이라 하더라도 초성이냐 종성이냐에 따라 자판의 키를 달리 배정해 놓고 있다.
이미 한글 타자기에서는 자음 1벌과 모음 1벌로 구성된 2벌식(외솔식)과 초성 자음 1벌과 모음 1벌, 받침 자음 1벌로 된 3벌식(공병우식), 그리고 초성 자음 1벌과 모음 2벌, 받침 자음 1벌로 구성된 4벌식(종래의 표준 자판)과 이 밖에 초성 자음 2벌, 모음 2벌, 받침 자음 1벌로 된 5벌식(김동훈식) 등이 사용되어 왔는데, 정부는 1969년 7월 4벌식을 타자기의 표준판으로 정하는 한편, 2벌식은 텔레타이프의 표준판으로 확정한 바 있다.
그 뒤 다시 1985년 5월 타자기의 표준 자판을 2벌식 입력에 4벌식 출력 방법으로 바꾸었다. 1982년 6월에는 당시 공업진흥청(KSC-5715)에서 컴퓨터 표준 글자판으로 2벌식을 KS로 고시, 이에 따르도록 하였다. 이들 표준판은 네모꼴에서 다소 벗어난 자형이기는 하나, 컴퓨터의 소프트 프로그램으로 글자 모양을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어 별 문제는 없다.
과거 한 자씩 문선, 식자, 조판하던 때의 한글 글꼴이 명조체와 고딕체 두 가지에 불과했던 것과는 달리, 오늘날에는 50종 이상의 한글 자체가 개발되어 컴퓨터 소프트에 내장되어 있으므로 편집자가 임의대로 글자체를 선정할 수 있게 되었다[그림 4].
출판·인쇄 산업은 컴퓨터에 의한 입력, 생산 방식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는데, 한글의 기계화는 첨단 과학 발전과 더불어 이미 ‘조판’이라는 용어에서 ‘입력’이라는 전자화(電子化)된 용어로 옷을 갈아입고 미래의 정보화 사회에 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