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8): 근대 이후 어문 생활에서의 기능(1-2)

한글(8): 근대 이후 어문 생활에서의 기능(1-2)

운영자 0 697 2023.01.10 00:24

근대 이후 어문 생활에서의 기능

1.갑오개혁~대한제국시대의 국문 사용

1894년 갑오개혁이라는 근대적 대개혁을 단행하는 가운데, 갑오개혁기 조선 정부는 1894년 11월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을 공포하여 종전의 한문 대신에 국문을 공문으로 바꾸었다. 450년 만에 언문이 비로소 공식적인 국자의 자격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칙령 14조에는 국문을 본으로 하되 한문 번역 또는 국한문을 덧붙인다는 과도적 조처도 규정해 두었다. 1883년 1월 ≪한성주보 漢城周報≫가 이미 그러한 것이었지만, 1894년 12월의 이른바 <홍범(洪範) 14조>라 불리는 <종묘서고문 宗廟誓告文>과 <교육입국조서 敎育立國詔書>는 이에 근거한 공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최초의 결정은 점차 변질되어, 본으로 삼는다던 국문보다 과도적인 국한문이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국문을 본으로 한다는 원칙은 지나친 이상이었고, 과도적인 3원제는 현실적인 국한문으로 낙착된 것이다. 1895년 7월 소학교 국어 교과서인 ≪소학독본≫이 우선 국한문만으로 서술되었다.

당시의 상황은 사실 갑작스러운 개혁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정부의 ≪관보≫를 예로 들면, 갑오개혁과 함께 순한문으로 창간되었다가 이듬 해 국한문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08년 2월 6일 ≪관보≫ 관청사항에서 공문 서류에 국한문을 사용하지 않고 순한문으로 쓰거나 이두를 혼용하는 것은 규례(規例)에 어긋난다고 경고하고, 각 관청의 공문 서류는 일체 국한문을 교용(交用)하고 순국문이나 이두, 외국 문자의 혼용을 부득(不得)함이라고 지시하였다.

이는 시대 문자 생활의 혼란상을 말해 주는 동시에, 당초의 칙령 공문식이 사문화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종래의 3원제가 인습적으로 잔존했다는 뜻으로도 이해된다. 여기서 인습이란 양반층의 한문, 평민 상층의 이두, 평민 하층의 국한문, 서민층의 국문으로 구분되던 것을 말한다. 즉 서민층의 국문을 본으로 삼으려던 당초의 이상은 깨지고, 평민 하층의 국한문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 된다.

이러한 양상은 물론 당시의 사회 계층과 밀접하나, 근대화와 더불어 갑자기 늘어난 어문 생활의 부담을 감당하기 위해 가장 긴급히 요청된 것은 새로운 질서였다. 이는 바로 일반적인 국어의 근대화, 즉 언문일치(言文一致)였다. 언문일치는 일상 언어로 표현하자는 현실화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시대에 방향을 잡은 국한문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언해(諺解) 법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언문일치가 실현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지만, 1910년 7월에 발표한 이광수(李光洙)의 논설은 이미 그 진수를 피력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 용문(用文)에 대해 국한문이란 순한문에 국문으로 토를 것에 불과하다면서, 마음으로는 순국문을 쓰고 싶지만 이는 이해하기 어려워 신지식 수입에 저해가 된다고 전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문으로 말만 한문으로 쓰고 밖의 말은 모두 국문으로 쓰자고 주장하였다. 이 방안은 물론 궁책이지만 현실에 입각한 것으로서, 구두어에 한자를 혼용하자는 것이니 언문일치를 주장한 최초의 논설이었다.

문제의 원인은 한문을 국문으로 엇바꾸는 것과 같은 대개혁을 단행하면서 사전에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는 있었다. 타의에 의해 이루어진 개혁이 순조롭지 못했던 탓이지만, 당시의 당면 과제는 조선 말기의 혼란 상태에서 하나의 국어 규범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작업이 한학자의 힘으로 될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국어에 관한 학자나 어떠한 기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정부 차원의 정책이 있을 없었고, 문제를 해결할 뚜렷한 대안도 없었다. 실제로 받침을 할 것인지 연철을 할 것인지, 또는 아래아가 무엇인지 모두가 의문이었. 특히 아래아의 정체와 처리를 둘러싼 문제는 이 시대 최대의 의문이었다.

당시 이에 대해 이봉운(李鳳雲)·주시경·지석영(池錫永) 등이 표명한 의견도 빗나가고, 지석영이 개인적으로 상소한 <신정국문 新訂國文>은 기묘하게 창조된 신문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절차를 통과해 1905년 7월 공식적으로 백일하에 공포되는 사태가 벌어졌다.아래아 대신에 괴상한 (ㅣㅡ합음)자를 쓰라는 불가능한 명령이 내려지자, 이번에는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의론이 분분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학부에 설치된 것이 국문연구소였다.

1907년 7월 최초의 국어 연구기관으로 창설된 이 연구소는 2년 후인 1909년 12월 10제(題)에 걸친 당면 정책 방안을 의결하여 보고하기에 이르렀으나, 그 타당한 최종안도 경술국치로 인하여 불발탄이 되고 말았다.

이를 통해 이능화·주시경·어윤적(魚允迪) 등이 개화기의 국어학자로 두각을 나타낸 반면, 이 시대는 정책 부재의 상태로 종말을 고하였다. 즉, 새나라의 국어를 가다듬어 일정한 규범을 세우려던 목표는 실패로 돌아가고, 어문 생활의 개선은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국문을 본으로 한다는 당초의 이상도 빛을 잃고, 국어 순화를 지향한 국어 운동이 개인적으로 끈질기게 이어져나갔을 뿐이었다.

1886년 4월 창간된 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은 순국문에 띄어쓰기를 해서 3년이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이봉운(李鳳雲)의 ≪국문졍리≫(1897)도 국어 존중에 기여했지만,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한 주시경은 실무적인 측면에서 국어 규범의 확립에 각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하였다.그는 표의적 형태 표기에 착안하여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고 중의를 모으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2세 교육을 통한 장기적인 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다. 그가 독자적으로 초기 국어 문법의 수립에도 심혈을 기울이며 저술을 통해 주장한 새받침이 바로 그것이다.

1909년 ≪국문연구≫에는 새받침 17종 93개가 제시되었으나, 이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다. 최근 발견된 ≪한글모죽보기≫에 의하면, 그는 1907년 7월부터 학교 이외의 국어강습소에서만도 중등과 300여 명, 고등과 70여 명, 하기강습생 100여 명을 각각 배출했고, 1908년 8월에는 국어연구학회(한글모의 전신)를 창립하여 그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것은 1930년대 위세를 떨친 뒤 주시경파의 원동력이 되었다.

시대 16년간의 국어 정책은 시대 의식의 부족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우선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이상에 치우쳐 순국문을 채택했다가 공식 절차도 없이 전통적인 국한문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신정국문>의 무모한 채택으로 빚어진 문제를 계기로 국문연구소에서 작성한 정부 차원의 <국문연구의정안>은 중요한 국어 규범의 확립 방안이었으나 당초부터 서둘렀어야 했던 이 작업은 시대 의식의 부족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국어의 근대화라는 중대한 소임은 유기되고, 현실에 이끌려 한문을 국한문으로 바꾼 것이 그 하나의 실효가 되었을 뿐이다.

한편, 시기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던 국어 순화는 정책적으로 고려되지 않고 민간의 국어 운동으로 맡겨져 침략에 맞서는 자주 독립 운동의 한 방법으로 전개되는 데 그쳤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도 현실을 떠난 이성적 이념 아래 이루어졌던 탓에 일반적인 호응이나 사회적인 확산은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시대적 배경에도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갑오개혁이라는 개혁 자체가 일제의 강요로 강행되었고, 청일전쟁과 한일공수동맹 및 청일강화에 따른 1895년 일제의 내정 간섭, 러일전쟁과 제1차 한일협약에 이은 1904년 일제의 고문정치, 러일강화와 제2차 한일협약에 따른 1905년 일제의 통감정치, 고종 양위와 제3차 한일협약에 이은 1907년 일제의 차관정치, 경찰권 박탈에 이은 1910년 일제의 강점이 연쇄적으로 이루어졌던만큼, 근대적 신생국 대한제국은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스스로의 정책을 수행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특히, 1905년 통감정치를 시행하면서 일본어를 병용하기 위한 편의로 국한문의 시행은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주체적으로 수립했을 것으로 보이는 국문연구소의 의정안도 일제에 의하여 폐기된 것이 거의 분명하다. 저들이 우리 나라의 안정이나 새로운 발전을 뒷받침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일제강점기의 국문 사용과 수난

대한제국은 일제의 일방적인 강압에 의해 멸망하고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 강점기는 단순한 강점이 아니라, 민족을 근본적으로 말살하려는 흉계를 가지고 철저한 동화정책이 끈질기게 시행된 시기였던만큼, 우리 국어의 수호와 발전은 심각한 위기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흉계도 단계적으로 이루어져,그 식민정책은 대개 전기인 무단정치시대와 중기인 문화정치시대와 후기인 강력정치시대의 3기로 구분된다.

8대 35년에 걸친 총독정치를 통해 종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은 국권의 상실과 함께 대한제국의 국어가 민족어로 전락하고, 외국어였던 일본어가 대신 국어로 등장한 것이었다.

일본은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에서 성급하게 국민 정신의 함양과 일본어 보급을 교육의 목적으로 내세웠다. 그 언어 정책은 출발부터 1국 1국어의 원칙을 악용하여 일본어 교육을 통한 국민 정신의 함양, 즉 노골적인 민족말살 동화예속 정책을 감행하려는 것이었다.

식민 정부는 취조국(取調局)에서 해오던 우리 민족 문화의 조사와 함께 1911년 4월 ≪조선어사전≫ 편찬에 착수했고, 내무부 학무국에서는 1912년 4월 통일을 목적으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저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기는 했으나, 최초로 실시된 국어정서법이었다.

철자법은 국문연구소에서 이미 작성한 <국문연구의정안>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따로 실태를 대상으로 성문화한 표음주의 철자법이었으며, 그 뒤 교과서에 채택되어 약 10년간 국어 규범의 기준이 되었다. 당시 형식적으로나마 조선어 교육을 병행했으니, 일본어 위주의 이중 언어 정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간에서는 조선광문회의 ≪조선어자전≫(말모이)을 비롯한 사전편찬, 김희상(金熙祥)의 ≪조선어전≫을 비롯한 문법서의 저술, 주시경을 중심한 조선어강습원의 국어 강습 등 국어 운동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국어 연구 내지 운동은 그 시대 상황으로 보아 이념적인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일제의 무자비한 무단정치는 이윽고 민족적 민중 항거에 부딪쳐 난관에 빠졌다. 독립을 선언한 1919년 3·1운동은 일제의 강점에 항거한 일대 민중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곤경에 빠진 일제는 부득이 유화정책을 내세워 약 18년간의 문화정치를 시작하였다. 민간 신문의 허가, 관습의 존중과 차별 대우의 철폐, 교육제도의 개선과 조선어 장려 등 표면적인 유화정책이 시행되었다.

우선, 저들이 계획한 ≪조선어사전≫이 1920년 3월 출판되었고, 이에 따라 1921년 3월 <언문철자법>이 개정되었다. 이것은 표준어와 국어 규범의 재정비라는 의미가 있었다. 어문 생활에서는 3ㆍ1운동을 고비로 1920년대에 언문일치가 이루어졌고, 민간 신문의 보급, 잡지의 융성, 민간의 계몽 운동 등으로 문자 생활이 확산되어 갔다.

그러나 저들의 20년 시정 실적은 1930년 통계로 취학률 24%, 문맹률 78%였다. 표면적으로는 문화정책을 내걸었지만, 저들이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한 반항 투쟁은 1929년 광주학생사건으로 표면화되었다.

한편, 1920년대에는 미진한 국어 규범의 확립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미 1921년의 철자법 개정에서 어윤적·권덕규(權悳奎) 등 후주시경파에 의해 제기되었다가 보류된 표의주의 철자법이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후주시경파는 1921년 12월 학회를 결성하고 운동에 나섰다.

1930년 2월 개정한 저들의 <언문철자법>에서는 다수 후주시경파의 참여로 표의주의 철자법이 채택되었다. 음소표기 대 형태표기의 논쟁은 첫번째 1446년 ≪훈민정음해례≫, 두 번째 1909년 국문연구소 <국문연구의정안>, 세 번째 1921년 개정된 <언문철자법>, 네 번째 1930년의 개정 과정에서 일어난 철자 파동 등 거듭된 대결을 거쳐 비로소 형태 표기로 낙착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이로써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후주시경파의 조선어학회는 철저하지 못한 <언문철자법>에 대한 반대, 전통적 보수파를 대표하는 박승빈(朴勝彬) 중심의 조선어학연구회는 양자에 대한 반대로 치열한 논쟁이 재연되었던 것이다.

다섯 번째 논쟁인 대결은 1932년 11월 동아일보사 주최의 토론회, 1933년 10월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 공표, 1934년 7월 재래식 정음파의 반대 성명에 이은 피차의 중상적 비방 등으로 이어지면서 불꽃을 튀겼다.

그러나 많은 학자를 포용한 한글파는 문화계의 호응을 받으면서 1936년 표준어사정, 1940년 <외래어표기법> 제정에 이어 1942년 ≪조선말큰사전≫ 출판에 착수하여 1921년의 개정 철자법을 주장하는 정음파보다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932년 창간한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 1934년 창간한 조선어학연구회 기관지 ≪정음≫, 1931∼1934년 민간 신문의 브나로드 운동과 강습회 등은 일제강점하의 현저한 국어 운동으로서 일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30년대 전후의 논쟁 및 출판물의 융성은 식민 정부의 언어 정책을 초월한 국어 운동의 고조와 확산을 자아냈다. 이 운동이 독립 운동의 일환이었던만큼 일제는 이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군벌에 의하여 다시 강력정치를 감행하였다. 이에 따라 허울 좋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살벌한 분위기의 민족 말살과 저들의 전쟁을 위한 총동원이 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1938년 4월의 파멸적 교육령에 의한 조선어과 폐지에 이은 조선어 금지와 일본어 상용의 강요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성전완수(聖戰完遂)라는 미명하에 전국토를 병영화하고 더욱 무자비한 만행을 자행하였다. 특히 1942년 10월의 조선어학회 사건은 악명 높은 것이었다.

1920년부터 용인해 왔던 학회 활동을 악랄한 <치안유지법>을 적용, 마구 엄단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징(韓澄)·이윤재(李允宰)가 감옥에서 숨지고, 출판 허가까지 받았던 사전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35년, 특히 그 후기 8년간은 문자 그대로 우리 민족사에서 전례가 없는 암흑기였다. 언어 정책이라고는 일본어의 강요뿐이고, 줄기차던 민간의 국어 운동은 뿌리째 뽑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본어 해득률은 저들의 통계로 1919년 1. 8%, 1930년 8. 3%에서 1938년 12. 3%, 1943년 22. 1%였고, 1945년에는 27%로 추정된다. 그 통치가 5년 더 연장되었다면 45%로, 10년 연장되었다면 85%로 상승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통계에 포함되어 있는 10세 미만 인구 34.2%를 제외하면, 1943년 22.1%는 33%, 1945년 27%는 역시 41%로 상승된다. 마찬가지로 45%는 68%로, 85%는 128%라는 초과 현상까지 나타날 것이다.

저들의 민족어 말살 정책은 1894년 이후 12년간의 일본어 부식기, 1906년 이후 30년간의 2어 병용기를 거쳐 1937년 일본어 전용기를 만들었다. 60년 기한으로 그 목표 달성을 꾀하였을 것이니,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며 8·15광복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따라서 1931년 이후 10년에 걸쳐 혁혁한 업적을 쌓은 조선어학회의 노력은 오유(烏有)로 돌아가고, 그 결정체인 ≪조선말큰사전≫은 완성되지 못한 채 소멸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이 사전은 국어규범을 세우기 위한 맞춤법·표준말·외래어표기 등을 장기간에 걸쳐 제정하고 이것을 기준으로 집대성한 최초의 국어 규범 사전이 될 것이었다.

국어 규범의 확립은 국어 근대화의 가장 긴급한 기초 작업인데, 이 중요한 문제가 완성될 찰나에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그래서 이미 매듭지은 일련의 국어 규범이 책자로나 존재할 뿐, 소멸 단계에 있는 국어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가장 암담한 시기가 되었다.

그러나 강인한 우리민족은 그들의 계획대로 쉽사리 소멸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총칼 앞에서 겉으로는 복종했지만, 민족의식을 지닌 집안에서는 개인적으로 한글과 한자를 가르쳤고,일제 막바지인 19457월에도 대한애국청년당이 부민관(府民館)에 투탄한 무력투쟁이 있었다.장하고 거룩한 민족정기가 끈질기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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