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어문 생활은 사대부인 양반층의 한문과 서리인 중인층의 이두로 나누어진 이원 체제였다. 즉 음성 언어로는 국어를 사용하면서, 문자 언어로는 양반층은 한문, 중인층은 이두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어를 발음대로 표기하는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으니, 문자 생활에서 새로운 문자가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언문이라 불린 이 새로운 문자는 주로 신(臣)이 아닌 민(民), 즉 서민의 글이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후, 나라에서는 그 자습서에 해당하는 ≪훈민정음해례≫를 편찬하는 한편, 과거에 훈민정음을 과하고, ≪동국정운≫을 편찬하여 한자음을 표기할 때 사용하던 반절을 대신하게 하였다.
또한, 개국을 칭송하는 ≪용비어천가≫와 부처를 찬양하는 ≪월인천강지곡≫ 및 ≪석보상절≫을 간행하여 신문자의 효용성을 입증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세종대인 1449년 정승을 비방하는 벽보가 나붙을 만큼 주효하였다.
신문자의 철자법은 당초부터 표음적인 음소 표기와 표의적인 형태 표기를 두고 상당한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이 관여한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은 형태 표기이고 ≪석보상절≫은 음소 표기인데, 특히 음소 표기였던 ≪월인천강지곡≫은 인쇄 후 형태 표기로 고친 흔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훈민정음해례≫ 종성해에서 예를 들어 양자를 논하면서 8종성으로 가히 족하다고 단정함으로써 공식적 방침이 천명되었다. 이 결론은 평민을 위해 만들어진 문자에 평민을 위한 철자법을 결정했다는 점에서 뜻깊은 것이며, 정책적으로도 매우 현명한 판단임에 틀림없다.
한편, 한자음 표기는 1448년 완화된 현실음을 교정한 ≪동국정운≫을 간행하여 시행에 옮겼다. 자모(字母)와 운모(韻母)를 모르는 서민층은 수용하기 어려웠지만, 기록상으로는 1481년 ≪두시언해≫ 초간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실시되다가 폐지되었고, 1496년(연산군 2) ≪육조법보단경언해 六祖法寶壇經諺解≫에 이르러 50년 만에 현실음으로 되돌아갔다.
훈민정음은 애초부터 서민을 위해 창제된 글인만큼 배우기가 어렵지 않았다. 식자층은 ≪훈민정음해례≫를 통해 쉽게 익힐 수 있었고, 서민층은 이를 재조정한 방식으로 배웠다.
1527년 ≪훈몽자회≫ 범례에는 반절식이 기록되어 있는데, 성종조 성현의 ≪용재총화≫에 ‘초종성팔자, 초성팔자’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창제 후 얼마 되지 않아 이 반절식이 고안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일찍부터 식자층은 여성과 서민층을 상대하기 위해, 여성과 서민층은 자신을 위해 각각 신문자를 배움으로써 신문자는 널리 확산되어갔다.
위에 열거한 국어 작품들이 창작되고 한서(漢書)의 언해와 역학서 등 많은 글이 퍼지면서 신문자는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불가의 불경 언해, 사대부의 가사와 시조, 교육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한서의 주해 및 번역, 계층을 초월한 전교(傳敎)와 편지 등은 그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인위적으로 만든 문자가 이렇게 정착된다는 것은 문화사적으로 보아 매우 특이한 일인데, 주로 문자가 없던 평민과 여성층에게 주어져 이들에 의해 전승되며 정착되었다. 당시 한문을 모르는 계층이라는 점에서는 여성은 서민층에 속해 있었다.
연산군 때인 1504년 일어난 투서사건으로 인해 한때 언문은 탄압을 받았으나, 이러한 문자 생활의 3원 체제는 조선 말기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또한, 음소 표기 철자법이나 반절식 문자 교육도 다소 변천을 겪으며 계승되었다. 특히, 순언문의 시가와 소설이 점차 유행하면서 언문은 많은 평민 및 여성층에게 친숙하고 불가결한 글이 되었다.
한글의 운동사를 이야기할 때, 흔히 초기의 정음시대와 1504년 연산군의 금란(禁亂) 이후 개화기까지의 약 400년을 기간으로 하는 언문시대로 구분한다. 그러나 한글의 변천을 놓고 보면, 임진왜란을 분수령으로 크게 양분된다. 17세기는 병자호란이 잇따랐고, 실학파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중세가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제 당시처럼 어떠한 어문 정책이 시행되지도 않았고, 철자법이 자연적 흐름에 맡겨져 간소화되면서 규범이 불확실한 양상을 띠었다. 이는 공식적인 언어 문자의 교육이 없었던 시대 상황에 기인한다. 언문은 아녀자와 서민층에게 반절식으로 가르쳐졌고, 그 철자법은 이들 개개인에 의하여 임의로 쓰여지면서 수세기가 흘렀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철자법은 대개 중종 때부터 문란해지기 시작하여 날이 갈수록 지향 없이 표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창제 당시에 규정한 음소 표기의 원칙은 계속 전승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 일어난 실학 운동은 새로운 조선학(朝鮮學)이 형성되게 하고, 이 조선학의 형성은 아름다운 근세적 정음문학(近世的 正音文學)의 융성과 함께 정음 연구를 근세적 문자음운학(文字音韻學)으로 부흥시켰다. 실학은 본질적으로 근대적 현실성과 민족적 주체성을 지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실학파의 저술로서 정음에 관한 논술은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으나, 그 주류를 이룬 것은 최석정(崔錫鼎)·이사질(李思質)·신경준·황윤석·유희의 저술 등 어디까지나 ≪주역 周易≫을 바탕으로 한 한자음의 이상적 표기를 위한 연구였다.
동시에 청대 고증학의 영향으로 고증학풍이 형성됨에 따라 물보류(物譜類)가 편찬되었다. 이들은 한문을 위주로 하고 있으나 국어 자료가 수록되어 있어 조선사서로 평가된다. 그 요인은 실학파의 실사구시(實事求是), 무징불신(無徵不信)이라는 학문적 방법론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휘집뿐만 아니라 방언과 속담의 수집, 어원의 탐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업적이 이루어졌다. 홍명복(洪命福)의 ≪방언집석 方言集釋≫(1778)이나 이의봉(李義鳳)의 ≪고금석림 古今釋林≫(1789) 등은 동양어 사전인 동시에 기초 어휘집으로서도 가치가 있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우리 방언의 기록, 속담의 주석, 어원의 기술 등도 조선학의 일환으로 축적되었다. 특히, 순조 때 유희의 ≪물명고 物名考≫ 주석 곳곳에 등장한 무려 1,600여 개의 희귀한 우리말 어휘의 기록, 210개의 속담이 실린 정약용(丁若鏞)의 ≪이담속찬 耳談續纂≫(1820)과 순조 때 300여 개의 속담이 수록된 조재삼(趙在三)의 ≪송남잡지 松南雜識≫ 등 속담집은 당시의 조선학이 뜻하는 근대 지향의 민족적 성향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업적의 축적은 모두 전례가 없던 것이며, 조선 후기의 조선학이 최초로 이룩한 하나의 특징이다. 이것은 즉 근대화의 한 전초가 되는 사실로서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하겠다.
문자 학습이 반절식으로 행해졌음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은데, 19세기에 유행하던 반절을 통해 어떻게 학습이 이루어졌는가를 밝혀보기로 한다.
이 반절표는 ≪훈몽자회≫ 범례의 언문 자모와 같은 문자 조직에서 유래한 것이나, 지금 전하는 것으로는 일본 이리에(入江萬通) 등의 ≪화한창화집 和韓唱和集≫ 권하에 수록된 일본통신사 종사관기실(從事官記室) 장응두(張應斗)의 조선 언문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1719년(숙종 45) 9월 일인에게 써 주었다고 하니 약 270년 전의 일이다.
그 뒤 거의 같은 양식의 반절이 문헌에 종종 나타나나, 1869년에 간행된 불서 ≪일용작법 日用作法≫에 기록된 언본(諺本)은 좀 다르다. 1889년에 간행된 ≪신간반절≫ 1장도 이와 같은 종류이나, 신간 이전의 구판이 따로 있어 그 연대는 19세기 중엽으로 소급될 수도 있다. 이들은 입문기의 문자 학습을 교육적으로 고안한 실례로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표4] 의 언본은 한자음으로 초성을 표시하고, [표 5] 의 반절은 그림으로 초성을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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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언본은 ‘可’자를 보고 ‘가’행을, 반절은 그림 ‘개’를 보고 ‘가’행을 익히도록 한 것과 같다. 이들은 입문기의 문자 학습을 혼자 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 크게 기여했는데, 당시의 교육 방법이 흥미롭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 본문 15행(와워줄 포함)을 익히면, 제2단계는 이 본문에 받침 9자를 받치는 공부를 하고, 제3단계는 이들에 된시옷이 붙는 5행을 익힘으로써 완결된다.
이 방식은 아주 구조적이고 기계적이어서 하루아침에 깨칠 수 있다고 할 만큼 쉽다. 오늘의 교육에서도 계승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모 구조와 그 철자 원리도 한글이 과학적 문자임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