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의 창제는 국문 문학의 본격적 개화의 길을 열었다. 정음의 반포에 앞서 1445년 한글로 된 최초의 문학 작품인 <용비어천가>가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역성 혁명을 합리화하고,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동기에서 만들어진 총 125장의 악장체 영웅서사시이다. 단편적 사실을 각 장별로 서술하고 있어 본격 영웅서사시로서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나, 국문 서사시의 선편을 잡은 작품이다.
1447년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으로 편찬한 ≪석보상절≫은 ≪석가보 釋迦譜≫의 내용을 국문으로 옮긴 것인데, 후대의 불경언해류와는 달리 아름다운 우리 문체로 된 산문 서사문학의 최초의 작품이다. ≪석보상절≫을 본 세종은 같은 해인 1447년 석가의 공덕을 예찬하여 친히 악장체의 장편시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후에 세조는 1459년 위의 두 작품을 합편하여 ≪월인석보 月印釋譜≫를 간행하였다. 한 줄거리의 <월인천강지곡> 몇 수를 먼저 싣고, 그 내용에 해당하는 ≪석보상절≫의 대목을 그 다음에 실었다. 그러나 두 작품을 합편하면서 권의 편차와 문장에 상당한 수정이 가해졌다.
이상은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 국가 혹은 왕가가 주도하여 제작한 국문 문학 작품으로, 국문의 문학적 가능성을 처음으로 실험, 확인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국문의 문학적 기능이 관의 주도 아래 조심스럽게 실험,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문학에 심취한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이를 외면하고 여전히 한문을 문학 수단으로 삼았다.
일반 국민의 계몽과 교화를 위한 훈계서류의 언해와 세조와 같은 신심 깊은 군왕의 각별한 배려로 추진된 일련의 불경 언해 사업은 국문의 서사 기능을 더욱 개발하여 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높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 때 이루어진 ≪명황계감 明皇誡鑑≫의 언해(1464), ≪선종영가집언해 禪宗永嘉集諺解≫ㆍ≪금강경언해 金剛經諺解≫ㆍ≪심경언해 心經諺解≫ㆍ≪아미타경언해 阿彌陀經諺解≫ㆍ≪원각경언해 圓覺經諺解≫ㆍ≪목우자수심결언해 牧牛子修心訣諺解≫, 성종 때 인수대비(仁粹大妃)의 발원으로 인출한 ≪법화경언해≫ㆍ≪능엄경언해≫ㆍ≪원각경언해≫ 등, 그리고 ≪내훈≫의 간행은 그 자체가 반드시 문학적 업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국문의 문학적 기능을 여러모로 확인시켜 주었다.
1481년 ≪두시언해 杜詩諺解≫가 간행되고, 1484년 ≪연주시격 聯珠詩格≫과 ≪황산곡집 黃山谷集≫이 언해됨으로써 한시의 국역을 통하여 국문의 문학어로서의 기능이 거듭 확인되었다. 1493년 성현 등이 찬진한 ≪악학궤범 樂學軌範≫은 <동동 動動>·<처용가 處容歌>·<삼진작 三眞勺> 등 고려의 가요를 국문으로 정착시켜 우리 가요 국문화의 본보기를 보였다.
성종 때 가사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 賞春曲>이 나왔고, 이어 1498년 조위(曺偉)의 <만분가 萬憤歌>가 나왔다. 16세기 초두 연산군의 언문 박해가 시작되면서 모처럼의 국문 문학 활동은 한동안 침체되었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 각종 언해 사업이 재개되면서 국문에 의한 문학 창작도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김구(金絿)의 <화전별곡>, 주세붕(周世鵬)의 <도덕가>·<오륜가>, 양사언(楊士彦)의 <남정기> 등 가사 작품이 창작되는 한편, 이현보(李賢輔)는 <어부가>ㆍ<효빈가 效嚬歌>ㆍ<농암가 聾巖歌> 등의 단가를 지었다.
여말 이래의 시조 문학의 전통은 국문의 구사를 통해 조선에서 더욱 그 지반을 다져 나갔다.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 陶山十二曲>을 비롯하여 송순(宋純)의 <자상특사황국옥당가 自上特賜黃菊玉堂歌>, 유희춘(柳希春)의 <헌근가 獻芹歌>ㆍ<감군은가 感君恩歌>, 정철(鄭澈)의 <훈민가 訓民歌>ㆍ<장진주사 將進酒辭>, 박인로(朴仁老)의 <조홍시가 早紅枾歌>, 장경세(張經世)의 <강호연군가 江湖戀君歌> 등이 나왔다.
광해군 때 윤선도(尹善道)는 <견회요 遣懷謠>ㆍ<우후요 雨後謠>ㆍ<산중신곡 山中新曲>ㆍ<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ㆍ<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ㆍ<몽천요 夢天謠> 등 국문 문학의 정수로 일컬을 만한 수작을 내놓아 순수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활용하여 본격적인 문학어로서의 국어의 면목을 드러내었다. 이 밖에도 시조를 남긴 이는 이이(李珥)ㆍ권호문(權好文)ㆍ이정환(李廷煥)ㆍ김상용(金尙容)ㆍ황진이(黃眞伊)를 비롯하여 수없이 많다.
가사 문학도 시조에 못지 않게 사대부들이 즐겨 지었던 국문 문학의 장르였다. 조선 초기에 국문이 소외되었던 것과는 달리, 중기에 이르러서는 비록 제한된 범위이기는 하나 문학 담당 계층인 사대부들의 국문에 대한 인식이 다소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국문 문학에 대한 문학으로서의 인식은 그다지 철저했던 것 같지는 않고, 득의(得意)의 자리나 실의(失意)의 자리에서 손쉽게 소회의 일단을 토로하고 울적한 심사를 해소할 수 있는 표출 수단, 아니면 ‘몽매한 백성’을 깨우쳐 타이르는 교화 수단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들이 부른 국문 가요는 대부분 연향(宴享)의 자리에서 가창했거나 배소(配所)에서 읊조렸던 것이다.
가사 문학에서는 16세기 후기 정철의 <성산별곡 星山別曲>ㆍ<관동별곡 關東別曲>ㆍ<사미인곡 思美人曲>ㆍ<속미인곡 續美人曲> 등의 작품이 일세를 풍미하였다. 특히, <관동별곡>을 비롯한 그의 가사 3편은 일찍부터 ‘좌해진문장(左海眞文章)’이라는 극찬을 들을 만큼 가사 문학의 수준을 한 층 높이 끌어올린 작품이다. 정철에 이르러 가사 문학은 국문학의 진수를 드러내었다고 하겠다.
명종 때 백광홍(白光弘)의 <관서별곡 關西別曲>, 양사언의 <미인별곡 美人別曲>, 이황의 <환산별곡 還山別曲>·<금보가 琴譜歌>, 선조 때 이이의 <자경별곡 自警別曲>, 송순의 <면앙정가 俛仰亭歌>, 이원익(李元翼)의 <고공답주인가 雇工答主人歌>, 휴정(休靜)의 <회심곡 回心曲>, 허강(許橿)의 <서호별곡 西湖別曲>, 이현(李俔)의 <백상루별곡 百祥樓別曲>, 박인로의 <태평사 太平詞>ㆍ<선상탄 船上嘆>ㆍ<사제곡 莎堤曲>ㆍ<누항사 陋巷詞> 등이 지어졌고, 그 뒤에도 광해군 때 조우인(曺友仁)의 <산새곡 山塞曲>ㆍ<매호별곡 梅湖別曲>ㆍ<자도가 自悼歌>ㆍ<관동별곡 關東別曲>, 인조 때 박인로의 <영남가 嶺南歌> 등 사대부의 가사 작품이 꼬리를 물고 나왔다.
불교 경전과 유교 경전의 언역 사업에 이어 ≪삼강행실도≫·≪이륜행실도≫ 등의 번역(15세기 후기 및 1518년), ≪열녀전 列女傳≫의 언해(1543), 불교 영험담류(佛敎靈驗譚類)의 언해 등은 국문에 의한 설화류의 서술 가능성을 더욱 성숙시켜 갔다.
중종 6년(1511) 채수(蔡壽)가 지은 <설공찬전 薛公瓚傳>(한문)은 그 내용이 문제가 되어 왕명으로 금서 처분되었는데, 1996년 그 국역본 <설공찬전>이 발굴(이복규)됨으로써 역어체 국문 소설의 소설사적 의의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명종 연간에 보우(普雨)가 찬술한 것으로 보이는 ≪권념요록 勸念要錄≫은 11편의 불교 영험담을 한문과 국역문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 비교적 짧은 10편은 중국에 원전을 두고 있는 설화이나, 맨 앞에 실린 <왕랑반혼전 王郎返魂傳>은 고려간본 ≪아미타경 阿彌陀經≫(1304)에 수록된 <왕랑전 王郞傳>(한문)이 원전으로 간주되는 바, 이는 ≪궁원집 窮原集≫ 인문(引文)이다. 보우는 한문본 <왕랑전>을 윤색, 증연하고 다시 이를 국문으로 번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미루어 초기 발생의 국문 소설은 한문을 발판으로 하여, 이를 번역함으로써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의 역어체 국문 문체는 문학어로서 아직 미흡한 단계의 생경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본격적인 국문 소설의 문체는 광해군 때 허균(許筠)이 지었다는 <홍길동전 洪吉童傳>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난정 때의 인목대비(仁穆大妃) 서궁유폐사건의 전말을 그린 <계축일기 癸丑日記>는 궁인이 쓴 실기인 듯한데, 생생한 묘사와 정감 어린 문체는 국문 서사문학의 새 경지를 열었다. 역시 궁인의 작으로 보이는 <산성일기 山城日記>는 국문으로 쓴 실기로, 같은 제재를 다룬 허구적 수법의 전쟁 소설과 그 서술의 사실성에 있어 대조된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문 서사문학 작품이 활발하게 창작되었다. 박두세(朴斗世)의 <요로원야화기 要路院夜話記>에 이어 김만중(金萬重)의 <구운몽 九雲夢>·<사씨남정기 謝氏南征記> 등 비교적 문학성 높은 본격소설이 국문으로 창작되었다. <구운몽>은 국문·한문 양본이 전하는데, 한문 원본설이 지배적이다.
18세기 이후 국문 문학은 괄목할 만한 전개 양상을 보인다. 시가 분야에서는 ≪청구영언≫ㆍ≪해동가요 海東歌謠≫ㆍ≪고금가곡 古今歌曲≫ 등 가곡집의 편찬에서 보이듯 국문 가요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다.
시조에서는 서사성과 풍자성이 강한 사설시조가 출현하게 되었고, 가사에서는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 日東壯遊歌>와 같은 장편 기행가사 작품이 나왔다. 한편, 안조환(安肇煥)의 가사 <만언사 萬言詞>, 이세보(李世輔)의 <신도일록 薪島日錄> 등 유배 생활의 신고를 다룬 국문 작품도 있다.
소설은 군담류(軍談類)ㆍ염정류(艶情類)ㆍ전기류(傳奇類) 등 각종 작품들이 출현하였다. 궁정문학으로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한중록 閑中錄>은 사실적인 필치와 세련된 조사(措辭) 등 실로 국문문학의 백미편이라 이를 만하다.
19세기 중엽 한산거사(漢山居士)의 장편 가사 <한양가 漢陽歌>는 수도 한양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면서 봉건 사회의 생태를 은연중에 풍자하고 있다. 이 무렵 경판(京板)ㆍ완판(完板)의 방각소설이 간행되면서 국문소설은 독자의 폭을 점차로 넓혀갔다.
1906년 개화의 물결을 타고 신소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언문 일치의 국문 문체가 개발되었다. 그러나 종래의 국문 소설도 신소설과 함께 공존하면서 새 인쇄술에 의한 ‘딱지본’으로 꽤 널리 보급되었다.
가곡집으로는 ≪남훈태평가 南薰太平歌≫ㆍ≪여창가요록 女唱歌謠錄≫ㆍ≪가곡원류≫ 등이 간행되었다. 이들은 국문 가요를 여러모로 총정리한 것이었고, 개인 시조집으로 가장 많은 작품을 수록한 이세보(李世輔)의 ≪풍아 風雅≫가 나왔다.
시조에서는 과거의 전통적인 형식을 어느 정도 고수하면서 새로운 현실을 담으려 하였다. 가사 문학도 전통적인 국문 문학이 새로운 사회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변신을 경험하고 있을 때 한편에서는 새로운 국문 문학 양식이 태어나고 있었다. 신소설·신시·창가 등이 국문 문학의 또 다른 가능성을 가늠하며 나타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