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섬서성 장안현 少陵原畔 兴教寺 西慈恩塔院 안에는 높이 8미터인 3층 묘탑 셋이 있다. 현장(玄奘, 600~664)의 墓塔이 가운데에 있고 그 동쪽과 서쪽에 圆测(613-696)과 窥基(632-682)의 墓塔이 있다. 모양과 크기는 현장 묘탑과 똑같다.현장의 지위를 고려하면 원측과 규기도 대단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원측은 신라의 왕손으로서 3세에 출가하고 15세에 당나라로 건너와 법상(法常)과 승변(僧辨) 밑에서 유식(唯識) 등 교학을 배웠고 현장이 645년에 인도로부터 귀국하자 그를 스승으로 모시기도 하여 유식학(唯識學)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다. 저서도 아주 많았다. 그는 중국어, 범어, 티벳어 등 6개 언어에 정통하였다. 원측은 정관 연간에 당태종으로부터 도첩을 받았고, 신라 신문왕이 여러 번 원측의 귀국을 요청하였지만 원측을 부처처럼 존중한 무측전(武則天, 624-705)의 저해로 귀국하지 못하였다 한다.
당시 장안에서 유학하는 신라 승려로는 원측 외에도 神昉,智仁,勝莊,玄范,無著,慧超,惠日 등이 있었다. 그들은 玄奘 등 6명 주역자(主譯者)들이 주도한 6개 역장(譯場)에서 역경(譯經)에 참가하였다. 당시 중국 불교계의 가장 중요한 사업 중의 하나가 불경을 한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는데 신라 승려들은 큰 기여를 하였다. ”6명의 주역자가 번역해 낸 경전은 모두 232부 1904권이었는데, 그중 76부 1273권은 이들 8명 한국 학승들의 지혜와 심혈을 모은 것”(김한규, 『한중관계사Ⅰ』, 263쪽)이었다.
(2022225, 박창근)